태풍 "매미"가 전국을 강타했다.
뉴스를 보니 관측사상 최고의 위력을 가졌으며 지금까지 나타난 피해만도 제대로 파악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라니 장난이 아니다.
신기한 것은 이 좁은 땅덩어리에 태풍의 길을 빗겨 선 이 곳, 서울의 하늘은 모처럼의 완벽한 가을이다. 먹구름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지만 전선을 형성하여 반은 푸른 하늘색이고,나머지 반은 여전히 잿빛이다.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날은 의외로 서울에서 시골의 정취를 느끼는 곳이다. 오래된 건물이며 낡은 화장실, 왜 여기는 개선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인지. 결국은 돈과 권력의 문제이리라.
33번 시외버스 운전사,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 것 같다.
과속과 급정거, 굽은 길의 연속, 대공원에서의 청룡열차를 타는 기분이다.
아슬아슬한 스릴을 만끽하며 출발지점에 도착했다.
산행은 보광사에서 시작했다.
태풍이 지나간 뒤라,하늘은 청명했고, 땅은 촉촉하게 적당한 물기를 머금고 있어 산행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육산(肉山)이라 메말랐을 때보다는 약간 촉촉한 상태가 걷기엔 더없이 좋기때문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조그만 암자 도솔암,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으며 지붕은 반쯤 날아가 비닐포장으로 빗물을 막고 있다.
벽면의 탱화는 이미 퇴색하여 낯선 자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조그만 현수막이 기와불사를 호소하고 있다. 법당 앞으로 다가가니 법당에선 불경을 읽는 독경소리대신 생존을 호소하는 말다툼소리가 들린다. 부처는 간데 없고 중생들만 있다.
해발 622미터의 앵무봉, 버려진 레이다는 아무 것도 포착하지 못하고 있고, 나의 눈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반쯤 걸린 먹구름이 바람에 밀려 왔다갔다를 반복하고 그에따라 햇살이 후레쉬를 비추듯 국지적으로 조명을 비추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예전 어느 날의 지리산행에서 마주한 운무를 기억나게 한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너무 이른 정상정복에 미진함을 느껴 종주를 하기로 결정하고 능선을 타기로 했는데, 길을 잘못들었는지 계곡으로 하산을 하고 있다.
장흥계곡이다. 여느 유명세를 탄 계곡과 마찬가지로 음식점과 사람들이 자연을 망치고 있다. 개발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공생의 길을 찾아야할 것이다.
다시 길을 찾아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쉽지 않다. 산은 높지 않은데 그 가슴은 결코 간단치 않다. 풀섶을 헤치고 겨우 또 다른 정상의 능선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멀리 사패산을 바라보며 오르내리기를 반복, 6시간여의 산행 끝에 말머리고개라는 곳에 도착했다. 여기가 출구다. 갇힌 나무가지를 헤치니 여지없이 허리를 자른 아스팔트길에 음식점들의 그 썩어가는 악취와 사람들로 분주하다.
다시 익숙해져야할 현실의 산(山)들이다.
산은 반드시 높아야 맛이 나는 것은 아니다. 산은 각자 저마다의 맛을 지니고 있다.
그 것을 느끼는 각자의 혀끝(취향)에 따라 그 맛 또한 제각각일 것이다.
고령산의 맛은 담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