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언제나 설레임을 동반하는 시작이다.
토요일, 근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는 설상가상으로 오후 3시 미팅까지 생겼다.
약속시간이 5시니, 서두르면 가능할 것이다.
아뿔사 막상 미팅이 시작되고 보니 맺고 끊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
서둘러보지만 이미 늦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예지촌 식당에서 주린 배를 급하게 채운다.
토종신토불이 재료와 정성으로 차려진 상은 금새 바닥이 나고, 그제서야
코끝을 스치는 공기가 이미 지나온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신선함으로 느껴진다.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자유로운걸 너무나 힘들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만사 제쳐놓고 달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산의 능선은 방금 머리를 깎은 남자의 뒷모습처럼 가지런하고,
햇살이 그를 비추는데 따라 점점 선이 아래로 벗겨진다.
부끄러움탓인지 더불어 붉어진다.
솔직함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당당한 것인가보다.
적나라하게 벗은 나무들 사이로 솔직함들이 보인다.
예정된 일정으로의 발걸음을 옮긴다.
미리내성지의 입구에는 벌써부터 엄숙함이 깃들여있다.
드문드문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더욱 경건함을 더하고,
신념을 다하다 박해를 받은 순교자들의 형장을 되살려 놓은 곳에는 목숨조차 가벼이 여기게 만드는 그들의 믿음이 존경스럽다.
그만큼 그들은 절실히 원했던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삼저수지로 가는 길 위에는 햇살이 겨울같지 않게 눈부시다.
봄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바람은 차지만 생명의 소리들이 들리는 듯하다.
영화 “섬”의 촬영지였다는 고삼저수지, 그 곳이 “섬”으로 연상되는 이유는 바라다보이는 건너편이 모습이 섬의 형상을 닮은 탓이다. 그러나 실상 그 곳은 육지와 연결된 곳이며, 그 곳에서 바라다보는 여기도 마치 섬처럼 보인단다.
불현듯 어느 외국작가의 짧은 소설 “벽”이 떠오른다.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그리움으로 어긋난 그들의 운명처럼, 섬처럼 보이는 이 곳과 저 곳의 사이에는 흐르지 않는 물들이 고여있다.
소통이 있었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을 흐르지 못해 영원할 수는 있을지라도
결국은 아무도 진실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있다.
섬도 아닌데 섬인 듯이 보이는 외로움은 감당하기 힘들 것이리라.
갈등은 약간의 표면적인 일렁거림으로 나타내는 것일까.
햇살아래 부서지는 수면에는 약간의 출렁임이 있다.
아마도 바람 탓일 것이다.
차를 돌려 “마노”로 향한다.
작은 테마공원같은 곳인데, 거창한 주제는 없어도 타악기연주실, 전시장, 남사당연구소, 야외결혼식장, 연못, 숙소 등의 아기자기한 공간들이 있다.
때마침 영화촬영중인 듯한데.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으로 보는 얼굴들은
현실적으로는 그 맛들이 없다. 분명 꾸미는 것들로 새로운 느낌들을 만들어내는 모양이다.
공감은 제각각의 몫이다.
“거꾸로 선 집”과 옆으로 누운 집“등 나름대로 볼거리를 간직하려 노력한 흔적은 있으나
그 속에는 작은 소품전시장으로 이용되고 있고, 그나마 비어있는 공간들이 많다.
적절히 채우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옆으로 누운 집”안에서는 따스한 햇살이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한잔 커피를 마시고 나니, 스르르 눈이 감긴다.
잠들기 좋아보이는 구석자리 소파로 내려앉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다시금 마지막 행선지인 칠장사로 간다.
혜소국사가 일곱명의 악인을 현인으로 인도했다는 뜻에서 유래한 칠장사에는
곳곳에 오래된 흔적들이 역력하다.
유난히 많은 사리탑들, 그 사이로 어울리지 않게 대웅전 앞의 새롭게 우뚝 선 탑,
부조화의 느낌을 전한다.
지금 역사적인 것들은 모두가 어슬픈 처음이 다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오랜 세월 뒤에는 다시금 여기를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의 역사로 되새길 그 맛을 느끼게 해 줄 것이리라.
되돌아 서니, 큰 개 두 마리가 승방을 지키고 있다.
여기도 어느새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곳이 되어버린 듯하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공식적인 일정을 마치고 다시금 처음 출발한 곳, 병점역으로 왔다.
유난히 많은 이 곳의 저수지, 그 속의 물들은 여전히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할 것이다.
썩어들 즈음에 다시금 바람의 힘을 빌어 깨움으로써 기억될 것이며
비록 소통하지 못하는 한계는 있을지언정 그리움은 영원할 것이다.
요즘같이 쉽게 변해버리는 것들에 익숙해진 나는 내심
그 흐르지 않는 것들의 영원한 힘이 전해온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아마도 그들은 바다가 되고싶어 하는 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들은 이미 섬을 닮아 있다.
2003.